내가 이 그림을 언제부터 좋아했는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키즈에서 별명으로 '월하 정인'을 쓴 때는 1998년이나 99년 무렵이니 이 그림의 설레임과 달빛의 에로스에 꽂힌 것이 무척이나 오래 되었음에 틀림없다.

 

달빛은 처연하고, 더구나 그믐달이 되면 어스름퍼지는 푸른 달빛이 사람마음을 녹여내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달은 여자로 상징되고, 음이고.. 이런 연결을 지어내지 않더라도..

 

여하간 설레는 여자의 발걸음은 이미 남자를 향해 있고, 전후 좌우 상황이 정지되어 있는 그림에 이미 꽉 차 있는 듯, 상상을 자극하기도 하여 이 그림이 그리 좋더니..

 

어느날인가.. 골목길에서 이런 달빛의 기운을 느낀 적이 있다.

그림의 글을 보라.. 달은 깊어 삼경인데, 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만이 안다..

어쩐지 골목길을 걸어가는데 이 그림 생각이 났다. 그 이후.. 달만 보면 기분이 애틋하다. 이 그림이 마치 나의 그림인양 (안타깝게도, 내가 한복을 입으면 저런 야사스러운 선은 안 나올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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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보다 나은 동물.. 비록 동물이 애정을 구하며 치사한 짓을 하거나 너무 본능에 충실하여 인간의 규범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한다 하더라도... 이도 저도 못하는 인간보다는, 배신하는 인간보다는 나을것이다.

 

독립영화가 100만 관객을 바라본다... 이 돌풍의 이면에는 낭만적이고 복고적인 감성이 분명 자리잡고 있을 것같지만, 영화의 연출은 그렇게 감정적이지 않았다. 감독은 그간 농촌사회 현실을 고발하거나 여타 사회문제-우리학교같은 경우-에 대한 작품을 만들어 왔다고 하는데, 감독이 할아버지, 할머니, 소의 관계에만 집중한 것이 오히려 효과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대놓고 강요하지 않는 것. 그렇게 하기까지 인간이 얼마나 깊은 내공이 필요한지... 나의 정치적 견해, 이해를 가족내에서도, 직장에서도, 심지어는 이 사회에서도 모두 쉽게 떠들고 남에게 강요하고 그렇지 않으면 일종의 sanction을 부과하는데, 의도한 메세지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하여 쉽게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이를테면, 내가 젊은 소가 늙은 소를 구박한다거나, 자식들이 아버지한테 소를 팔라고 뭐라고 해대는 것이나, 아니면 할아버지가 걸음을 걷기도 어려워하는 소를 일년 이상을 데리고 다니며 그 힘겨운 노동을 시키는 것을 보며 울분이 치밀어 오를 때에도 그저 카메라를 갖다 대고 있는 것.. 십수년 전 보도윤리 과목에서 교수가 자주 던지는 질문이다. 누군가 죽어갈 때 구해야 할까 진실을 보도하는 목적이 우선일까. 내가 느낀 불편함도 내 도덕률, 약한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에 닿아있다. 그러나 현실이 어디 그러한가.. 선의의 동기가 선의의 결과를 낳는가.. 세상이 몹시도 복잡하다.

 

워낭소리, 죽어가는 소의 코뚜레는, 정말 마지막 순간에야 풀어졌다. 당신 자신 평생을 자식 뒷바라지하며, 그저 일상적으로 노동을 해오는 할아버지 스스로 어떠한 교감을 느꼈는지, 동일시한 탓인지 그 마지막 순간에, 낫으로 코뚜레를 풀어주었다.

 

모든 인간의 인생은 노동으로 신성하기도 하지만, 살기 위해 노동해야 한다... 때로 인생의 의미를 찾게 되기도 하고, 때로 일해야 하는 것이 너무 버겁기도 하다.. 그저 매일매일 똑같이 살아가기 위하여 일해야 한다는 것은.. 소에게나 인간에게나 동일한 것일테다. 무척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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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위... 어찌 어느 여자가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남자가 허공을 바라보고 있든, 소시민으로서 그저 역사 속에 휘말리는 인물이든, 동성애자가 되든, 그냥 평범한 경찰관이 되어 여자의 발을 주물러주든, 우유부단해서 사랑하는 여자를 놓치고 저 캄보디아 들어가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를 하든, 아니면 정말 국가와 민족을 배신한 냉혈한이든... 그 남자 눈빛은 잊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그 정사가 끝난 후...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눈빛이나 여자가 죽음을 맞는 순간 그녀가 지내던 침대시트를 그저 쓰다듬다 어스름한 조명아래 비치는 그 떨리는 눈길, 눈물이 스며드는 그 눈. 그 남자를 보면 누구든, 남자든 여자든 눈으로 많은 말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구에게나 사랑이 다가오는 순간은 보편적이지 않을까. 지나치게 나의 일상을 일반화시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언제나 의심을 풀지 않고 있다가, 마음의 빗장을 걸고 있다가.. 지극히 경계하다가 스며드는 것이 그것이 교묘하게 왔다갔다 하는 아주 초긴장의 상태. 그것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 아닌가. 몸이 실존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사실, 사람들은 한 인간의 구성을 영혼과 마음과 몸으로 나누거나 이것저것 나누지만.. 혹자는 남자에게는 마음과 몸이 따로 논다고들 얘기하지만.. 아니다.. 그저 이 물질계에 존재하는 인간에게 몸이란 그저 몸이 아니다. 자기 마음의 현존이며, 실존이다. 욕망이라.. 머리속에, 가슴속에, 혼 속의 욕망이라는 것은 몸을 통해드러난다. 그것이 아니면 방법이 없는데.. 간혹 무시당하고, 혹사당한다.

 

서늘한 슬픔.. 이틀 내내 간다. 아니다. 그 이상일지 모르겠다. 두 주인공 간의 색과 계의 세계를 오가는 것이야, 수두룩한 인터넷 평가에서 보았을 것이고.. 그저... 영화를 본 내 감상은... 사실 평을 쓴다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슬프고 서늘했다.

양조위.. 너무 연기를 잘한다... 아.. 글이 엉망되고 있는 이유는 지금 회사에서 딴짓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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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한국에 돌아온지 세달이 다 되어가는데.. 시간은 한참 지난 것같다. 그 기간 동안 영화관에서 영화 딱 한편을 보았다. 그것이 천년학이다. 이청준의 소설을 원작화했다고.. 며칠전 지리산행을 위하여 전라도 인근을 가니, 역시 다른 플래카드 하나를 보았다. 송만갑 명창배 판소리대회.. 비슷한 류의..

 

소리.. 셋의 연, 혹은 넷의 연.. 인연이라는 것이, 겁을 통해 이루어진 인연이 그저 담담하게 지나가더니 왜 그렇게 눈물을 자극했는지 모르겠다. 어느날, 예전 언제 한국 소설은 절대 읽지 않던 내가 신경숙의 소설을 읽고 몹시 울던 것처럼, 이상스레 그 영화는 분명 영상으로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었음에도 소설을 읽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상은 과하지 않았고, 사람들의 감정이 넘실거리며 나를 불편하게 하지도 않았다. 그저 지나가는 듯, 거친 편집, 대사.. 그리하다 어느 순간인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저 말하지 못하고 가슴속에 파묻은 사랑과 인연이 가슴을 내려치며 엉엉 울게 만드는 그런 영화였다.

 

내 느낌에는 분명 잘 만든 영화인데.. 우리의 정서인데.. 왜 그 영화는 망한 것일까. 천박한 영화들이 판치던 지난 몇 년.. 인문학이 죽었다더니, 사회과학서점은 다 갔다더니, 서점가의 베스트셀러 칸 만큼이나 보는 것도 변화한 것이겠지.

 

광양 어딘가의 그 매화나무 흩날리는 아름다움.. 그 아름다운 흩날리는 꽃비에 또 같이 소멸해간 그 노인네의 인생도, 노래로 화답하며 친일이든 무엇이든 잠시 잠간 고단한 몸 기대었던 송화의 인생도.. 나도, 너도.. 불쌍한 인생.. 보듬고 살자.. 돌아보면 이해하고 보면 다 눈물나는 인생인 것은 매 한가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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