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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는, 일반화된 문장의 주인공보다는 한 서사의 주인공, 한 개인의 삶이 훨씬 소구력이 있다. 개체로서 개개인이 겪는 고통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공감을 하더라도 그것이 일반화된 명사와 동사로 지칭될 때는 별 감흥이 없는 듯하다. 성숙한 사람은, 사회 어른이라는 사람은 아마.. 그 몰개성적인 문장이나 사건에서 사람의 구체적 고통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예를 들어, 과거 우리 나라 언제 사법부의 사형선고로 누군가 사형을 당했다는 것과 어디 어디 학교에서 선생님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사형을 당하고, 그의 유언은 무엇이었으며 이제야 재심신청이 받아들여져서 재심선고가 있었다..는 정도가 되면 그 얘기는 더욱 실감이 나고, 사람들의 이성적 이해보다 더 강력한 감정적 공감과 분노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도 그렇다.. 어딘가에서 시골 어부의 간첩사건 연루와 사형집행에 대한 얘기를 읽었다.
민청학련 이후, 인혁당 사건이 가슴이 아팠던 것은 연이어 터지고 연결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민청학련 주도자들은 대부분 살아있고-사면 복권되는 등의 절차를 거쳐 국회의원이 된 사람들이 제법이다- 인혁당은 대구, 경북 지역의 그야 말로 소시민들이 주동자가 되어 사형선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집행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나마도 다른 사건들에 비해 다행이었다고 할 법한 것은 천주교 단체와 민청학련 사건 이후 권력에 가까워진 사람들과 몇몇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사건에 무척 관심이 많았던 나조차도 들어보지 못한 사건들이 얼마나 많은가. 오히려 큰 시국 사건에 관계된 것은 관심이라도 얻지만 사형의 집행이나 재심의 결정 또한 차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갖게 된다. 춘천 만화가게 주인의 재심사건이나 오늘 읽은 어부의 간첩사건이나 아람회 등등은 미안하게도, 조봉암 사건만큼의 관심을 얻지 못한다. 어딘가 그냥 재심의 기회조차 얻지 못한 사건들은, 어쩌면 사형까지 가지 않았지만 가장이 십수년 형을 받고, 전과자의 꼬리표를 달고, 가족이 해체되고 그런 일들은 아예 나의 레이더에 잡히지도 않을테고 그런 채로 드러나지 않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지면에서나 대하게 되는 일들을 보면, 아마도.. 당연한 귀결로서 드러나지 않는 관심을 얻지 못한 유사한 사건들이, 아니 그런 관심조차 얻지 못해서 더 아픈 삶을 살고 있을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여하간, 그래서.. 남들이 관심가져주지 않지만, 같은 고통을 받는 더 낮은 곳의 사람들의 삶을... 평균값에 묻혀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의 삶을 미루어보고 짐작해보려고 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그 피해자를 만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수용시설에서 대면하고, 얘기를 듣고,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좋았는데 지금은 유사한 일을 하지만 그럴 기회가 없다. 점차 나도 그래서.. 그저 우리끼리 하는 일에, 전문가들이나 쓸 법한 단어와 문장에만 익숙해져, 거기서 파생되는 논리와 사고로 일을 하는지도 모른다.
아침에도 그랬다. 다른 사람들이 100만원 벌 때 8천 얼마를 번다는 최빈곤층의 소득, 그들의 비율이 전체 가구(농어촌 제외)의 14%가 되었다고. 그래.. 그런 숫자를 보고 머리를 한번 더 써 본다. 그 돈으로 이 곳, 한국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삶의 모습이 어떨까.. 내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하겠지만,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무겁고 슬프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또 이내 잊어버린다.
그래도 한 가지 바라고 싶은 것,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 나보다 힘있고 똑똑한 사람들이 고민하고 노력해주었으면 좋겠다. 재심으로, 당사자는 사망했어도 가족이 있어 다시 판결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면..어쩌면 가족이 모두 뿔뿔히 흩어지거나 살기 어려워, 알지 못해 그마저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생각해주었으면 좋겠고, 건조한 법문을 보고 적용하는 기계적 일의 실재 무게를 알고 감당해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