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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는, 일반화된 문장의 주인공보다는 한 서사의 주인공, 한 개인의 삶이 훨씬 소구력이 있다. 개체로서 개개인이 겪는 고통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공감을 하더라도 그것이 일반화된 명사와 동사로 지칭될 때는 별 감흥이 없는 듯하다. 성숙한 사람은, 사회 어른이라는 사람은 아마.. 그 몰개성적인 문장이나 사건에서 사람의 구체적 고통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예를 들어, 과거 우리 나라 언제 사법부의 사형선고로 누군가 사형을 당했다는 것과 어디 어디 학교에서 선생님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사형을 당하고, 그의 유언은 무엇이었으며 이제야 재심신청이 받아들여져서 재심선고가 있었다..는 정도가 되면 그 얘기는 더욱 실감이 나고, 사람들의 이성적 이해보다 더 강력한 감정적 공감과 분노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도 그렇다.. 어딘가에서 시골 어부의 간첩사건 연루와 사형집행에 대한 얘기를 읽었다. 


민청학련 이후, 인혁당 사건이 가슴이 아팠던 것은 연이어 터지고 연결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민청학련 주도자들은 대부분 살아있고-사면 복권되는 등의 절차를 거쳐 국회의원이 된 사람들이 제법이다- 인혁당은 대구, 경북 지역의 그야 말로 소시민들이 주동자가 되어 사형선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집행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나마도 다른 사건들에 비해 다행이었다고 할 법한 것은 천주교 단체와 민청학련 사건 이후 권력에 가까워진 사람들과 몇몇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사건에 무척 관심이 많았던 나조차도 들어보지 못한 사건들이 얼마나 많은가. 오히려 큰 시국 사건에 관계된 것은 관심이라도 얻지만 사형의 집행이나 재심의 결정 또한 차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갖게 된다. 춘천 만화가게 주인의 재심사건이나 오늘 읽은 어부의 간첩사건이나 아람회 등등은 미안하게도, 조봉암 사건만큼의 관심을 얻지 못한다. 어딘가 그냥 재심의 기회조차 얻지 못한 사건들은, 어쩌면 사형까지 가지 않았지만 가장이 십수년 형을 받고, 전과자의 꼬리표를 달고, 가족이 해체되고 그런 일들은 아예 나의 레이더에 잡히지도 않을테고 그런 채로 드러나지 않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지면에서나 대하게 되는 일들을 보면, 아마도.. 당연한 귀결로서 드러나지 않는 관심을 얻지 못한 유사한 사건들이, 아니 그런 관심조차 얻지 못해서 더 아픈 삶을 살고 있을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여하간, 그래서.. 남들이 관심가져주지 않지만, 같은 고통을 받는 더 낮은 곳의 사람들의 삶을... 평균값에 묻혀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의 삶을 미루어보고 짐작해보려고 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그 피해자를 만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수용시설에서 대면하고, 얘기를 듣고,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좋았는데 지금은 유사한 일을 하지만 그럴 기회가 없다. 점차 나도 그래서.. 그저 우리끼리 하는 일에, 전문가들이나 쓸 법한 단어와 문장에만 익숙해져, 거기서 파생되는 논리와 사고로 일을 하는지도 모른다. 


아침에도 그랬다. 다른 사람들이 100만원 벌 때 8천 얼마를 번다는 최빈곤층의 소득, 그들의 비율이 전체 가구(농어촌 제외)의 14%가 되었다고. 그래.. 그런 숫자를 보고 머리를 한번 더 써 본다. 그 돈으로 이 곳, 한국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삶의 모습이 어떨까.. 내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하겠지만,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무겁고 슬프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또 이내 잊어버린다. 


그래도 한 가지 바라고 싶은 것,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 나보다 힘있고 똑똑한 사람들이 고민하고 노력해주었으면 좋겠다. 재심으로, 당사자는 사망했어도 가족이 있어 다시 판결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면..어쩌면 가족이 모두 뿔뿔히 흩어지거나 살기 어려워, 알지 못해 그마저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생각해주었으면 좋겠고, 건조한  법문을 보고 적용하는 기계적 일의 실재 무게를 알고 감당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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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아홉기둥"은 국가인권위원회 안경환 위원장이 재임중 펴낸 역서이다. 원저는 미국의 저명한 언론가, 밥 우드워드가 펴낸 책으로 생각보다 얇은 책인데, 역서는 몹시 두껍다. 약 1000페이 정도에 달하는 번역서는 정가 45,000원이 되어서 책한권에 너무 비싼 느낌이 없지 않았다. 그래도 꼭 읽어보고 싶었던 내가 얼굴에 철판을 깔고 이 책을 어떻게 구해 읽게 되었다.

 

이 책은 미국대법원 1969년 워렌대법관 말기부터 76년 렌퀴스트 대법원장으로 이어지는 시기의 대법원 내 주요 사건의 결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대법관 개개인에 대한 평가와 함께 그들간의 개인적 역학관계 때문에 주심을 맡은 판사가 어떻게 합의를 도출해내고, 최종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의 결정을 하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오늘 뉴스에 서울시의회에 가서 견학한 초등학교 아이들이 저 사람들이 코미디언같다고 했다는 것을 보았다. 예전 강금실 장관이 국회에서 국회의원들하는 행태를 보고 "코미디야, 코미디"라고 했다가 논란이 되었던 기억도 난다. 아마도 다른 기관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토론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야 하는 동네에서는, 우리나라 어느 곳이라도 아마도 코메디같은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의 토론문화가 성숙하지 않았고, 여전히 좌우, 분열적인 사회 양태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며, 결국에는 우리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나타나고 있을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대외적으로 의견을 발표하는 경우는 '의견표명'이나 '권고'라는 형식을 취한다. 그러한 의견은 전원위원회나 상임위원회나 소위원회의 결정을 통해 대외로 발표되는데, 중요한 사안은 주로 11명의 위원이 위원이 동일한 권위와 결정력을 행사하는 전원위원회에서 결정된다. 위원은 예로부터 대통령이 지명하는 4인의 위원, 이 중에 위원장과 1명의 상임위원이 있고, 야당이 2명, 여당이 2명, 대법원장이 3명을 지명한다. 여기에서는 위원장 또한 회의를 진행하는 역할을 담당할 뿐, 자신의 개인적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한 어떠한 행위도 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위원회 내에서는 가끔 자조적으로 봉숭아학당이라는 평가도 있는 것이, 논의의 수준이 떨어지고, 가끔은 본질에서 벗어나는 얘기도 나오며, 또 가끔은 위원의 결정 기준이 인권이 아니라, 정치적 고려나 여론이나 눈치보기이라는 생각도 들 때가 있기 때문이다.

 

안경환 위원장은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위원회 내에서 한 건이 결정이 되면 주심위원을 지정하고, 또 주요 사업에서는 그 사업을 담당하는 위원을 지정하는 등, 많은 부분의 권한이양을 했다. 때로 사무처에서 작성해 올리는 안건에 대해 강력하게 밀어붙인다면 의사결정이 빨리 이루어지거나, 더욱 강한 톤으로 나갈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드는 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번 순연이 되면, 2주가 더 소요되고, 위원회로서는 더 생생한 적시의 의견을 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경우도 간혹 있었을 지 모르겠다.

 

오늘 프레시안에 곽노현 교수가 쓴 글처럼 안경환 위원장은 전혀 진보나 보수같은 수식어를 붙이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아마 당신도 그런 수식을 거부하실 것이다. 차라리 낭만주의자라 할까 문인이라할까... 그런 색채가 짙다. 오히려 사람의 존재와 역설, 인간에 대한 관심이 많은 분이고, 예술에도 조예가 깊은, 감수성의 사람이다. 초창기에는 위원회 내 진보적인 직원들에게는 의구심의 눈초리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기에 오늘의 이임사와 같은 비판의 소리는 외부에서 오죽했겠나 하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여하간 미국의 연방대법원 9명의 대법관들처럼, 인권에 대한 토론과 판단을 해야 하는 국가인권위원회 11인의 위원들은 아쉽게도 대법관들에게 비견할만큼 지적이거나 열의에 가득차다거나 아니면 정말 인권적 가치에 전념하지 못했다. 인권위원들에게 요구되는 요소가 여러가지가 있었다면, 모두를 골고루 갖춘 사람들부터 하나도 갖지 못한 사람까지.. 그런 사람들의 집합체 정도가 국가인권위원회위원들이라고 본다.

 

안위원장이 펴낸 책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그런 정도의 수준이 되길 기대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의사진행방식이나, 결정하는 방식이나.. 아마도 당신의 의견이 강했을 때에도 그것을 먼저 드러내지 않고 가끔은 서로 상이한 위원들간의 토론을 통해 무언가 합의를 이루어내는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었는지. 그런 이상을 가졌던 것은 아닌가 나는 추측한다.

 

책은 재미있다. 지적이고, 생생하게 대표적인 미연방대법원의 판결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를 볼 수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회의도 재미있다. 코미디 수준처럼... 그래도 싸움박질은 하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오늘은 하고픈 말이 많았으나, 하지 못했고 여기 이렇게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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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내가 알고 있는대로 안경환 위원장의 품성상,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임사는 우회적 비판과 굴욕감과 이래서는 안된다고 하는 메세지가 묻어있다. 아래는 그 전문이다.

 


    친애하는 국가인권위원회 동료 여러분, 인권을 지고의 가치로 신봉하는 국민여러분, 저는 제 4대 국가인권위원회의 위원장에서 물러나 한 사람의 시민으로 돌아갑니다. 2년 8개월 남짓 전인 2006년 10월 30일, 바로 이 자리에서 저는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제게 주어진 3년의 법정임기를 채우겠다는 결의를 공언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앞당겨 떠나게 됨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법이 보장한 임기 만료일을 기다리지 못하고 앞서 물러나기로 결심한 사유는 지난 6월 30일,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간략하게 밝혔습니다. 되풀이하여 말씀드리건대 새 정부의 출범 이래 발생한 일련의 불행한 사태에 대한 강한 책임을 통감함과 동시에, 정부의 지원 아래 새로 취임할 후임자로 하여금 그동안 심각하게 손상된 국제사회에서의 한국인권의 위상을 회복하고 인권선진국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할 전기를 마련해 드리고 싶은 강렬한 소망과 충정 때문입니다. 

   당초 취임의 변에서 말씀드렸고, 기회 있을 때마다 되풀이하여 강조했듯이 저는 인권이란 이념적 좌도 우도 아니고, 정치적 진보도 보수도 아닌, 그야말로 모든 사람이 일용할 양식인 인류보편의 가치라는 믿음을 안고 살았습니다. 이 평범한 소신을 국가인권기구의 수장으로 지켜야 할 가장 으뜸가는 업무수칙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엄정한 정치적 중립을 강조했으며, 위원회와 ‘긴장어린 동반자’의 관계인 시민사회와도 일정한 거리를 둘 것을 주문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모든 언론에 대해서 동일한 기준과 성의로 자료제공과 홍보활동을 할 것을 독려하고, 제 스스로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저의 소신과 노력은 극단적인 분리와 대립이 항다반사가 되어버린 세태 아래 빛을 잃었습니다. 이념적 지향이나, 정치적 입장을 떠나,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 존중받는 일상의 인권을 신장하기 위해 쏟은 노력은 정권교체기의 혼탁한 정치기류에 막혀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설치근거나 법적 업무와 권한에 대한 성의 있는 이해를 애써 외면하는 듯한 몰상식한 비판, 무시, 편견, 왜곡의 늪 속에서 갈무리할 수 없는 분노와 좌절을 겪은 사람이 저 혼자만이 아닙니다.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재직 중에 얻고 쌓은 자신의 소회를 속속들이 드러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공직자의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고, 당분간 할 수 있는 것은 침묵뿐’이라는 금언도 익히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막연히 먼 장래를 기약하면서 홀로 가슴 속에 담아두기에는 너무나도  간절한 소망이 있기에 감히 몇 마디 당부와 호소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모두가 자부하듯이 한동안 우리나라는 아주 짧은 기간에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이룩한 경이로운 나라로 국제사회의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국민의 일상을 짓누르는 군사독재의 질곡을 벗어던지고 대다수 국민이 일상적 자유의 공기를 만끽하는 나라로 발전했습니다. 사회의 발전에 따라 인권의 외연이 크게 확대되었고, 다양한 세계관과 삶의 행태가 공존하는 관용의 사회로 이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성취는 많은 후발 국가들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나 많은 나라의 시샘과 부러움을 사던 자랑스러운 나라였던 대한민국이 근래에 들어와서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부끄러운 나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지난 해 7월, 고국을 방문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내뱉다시피 던진 충격적인 고백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국제사회에 나가보니 내가 한국 사람인 것이 부끄러웠다.”는 유엔 수장의 솔직한 고백이 곧바로 국제인권지도에 기록된 우리나라의 현주소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서글픈 현실을 수치스럽게 받아들이는 정부 관료나 국민의 숫자도 많지 않다는 사실이 더욱 수치스럽기도 합니다.     

   아직도 우리의 인권의식은 과거에 자행되던 국민의 생명과 신체에 직접적인 위해와 같은 노골적인 인권유린의 악몽의 포로가 되어, 진정한 선진사회를 향한 전향적인 발돋움을 위해 먼저 갖추어야 할 의식의 선진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권의 고귀한 가치는 정권의 교체나 연장에 따라 달라질 수 없을 것입니다. 정권의 교체는 국민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결코 국민은 인권의 탄압이나 후퇴를 선택할 리 없습니다. 앞선 정권의 실정의 유산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수반된 필연적인 변화로부터 구분해내지 못하면 때대로 시대착오적인 반인권정책의 유혹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선진사회’를 기치로 내걸고 압도적인 국민의 지지로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1년 반이 지난 이날까지 그 장점이 만개하지 않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수장으로서 느낀 소감은 적어도 인권에 관한 한, 이 정부는 의제와 의지가 부족하고, 소통의 자세나 노력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난해 1월, 신정부의 정식 출범에 앞서 5년의 재임기간 동안 이명박대통령이 추진할 국정과제의 청사진을 입안했던 대통령 직 인수위원회는 ‘과도하게 높아진’ 인권위원회의 위상을 ‘바로잡기’ 위해 법적으로 독립기관인 위원회를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변경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여 국내인권옹호자들의 반발은 물론 국제사회의 엄중한 경고를 받아야 했습니다. 2001년에 설립된 기관이기에 인권위원회는 이른바 ‘좌파정부’의 유산이라는 단세포적인 정치논리의 포로가 된 나머지, 1993년 유엔총회의 결의에 부응하여 설립된 기구라는 것, 권고결의 당시에 국가인권기구를 보유한 유엔위원국이 5,6개국에 불과했으나 15년이 지난 오늘에 120개국으로 급증한 사실을 감안하면, 그 누가  대통령에 선출되었더라도 필연적으로 탄생했을 기관이라는 사실은 추호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국제인권의 추세에 둔감한 정부이기에 지난 3월 말에는 ‘효율적인 운영’이라는 미명 아래 적정한 절차 없이 유엔결의가 채택한 독립성의 원칙을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기구의 축소를 감행함으로써 또다시 국제사회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정부 내에서도 국가인권위원회의 역할과 국제사회의 흐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을 고위공직자들조차도, 위원회를 특정목표로 삼은 명백한 보복적인 탄압에 침묵하고 심지어는 불의에 앞장서는 안타까운 현실에 실로 깊은 비애와 모멸감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내 나라, 내 정부에 대해서 불만이 깊더라도 국제사회에서는 내 나라, 내 정부의 입장을 최대한 옹호하는 것이 공직자의 도리임을 믿는 저이지만 그간 빚어진 실로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일들을 국세사회에서 변론할 자신과 면목이 없습니다. ‘청구인 국가인권위원장. 피청구인 대통령’이라는 법적 형식을 취한 권한쟁의심판의 청구를 헌법재판소에 제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입장이 다를수록 요구되는 정부기관 간의 대화와 소통의 부재가 빚어낸 비극이기도 합니다. 지난 20년간, 한국의 민주화를 제도적으로 이끌어 왔다는 칭송을 받고 있는 헌법재판소는 국제사회가 주목하고 있는 이 사안을 심사숙고하여 결정을 내려주실 것을 믿습니다.

    국제적 기준에 따라 설립된 국가인권위원회의 소임은 한 사안에서 나라 전체의 균형을 잡는 데 있지 않습니다. 국가권력의 남용과 부주의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일, 그것이 인권위원회의 본연의 소임입니다. 모든 국가기관을 대리하여, 약자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바탕으로 정부에 대해 고언을 제공하는 일, 그것이 국가인권위원회의 본질적인 임무입니다. 강자와 다수자에게 생길지 모르는 약간의 불편을 무릅쓰고라도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을 보장함으로써 사회전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민주국가. 인권국가, 법치국가의 본령입니다. 힘없는 자의 분노를 위무하고, 가난한 사람의 한숨과 눈물을 담아내는 일에 인색한 정부는 올바른 정부가 아닙니다. 흔히 소수자의 인권도 중요하지만, 다수자의 인권이 더욱 중요하다고들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평은 인권의 본질에 대한 성찰의 부족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권은 다수결이 아닙니다. 사회의 모든 기재가 다수자와 강자의 관점과 이해를 옹호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인간세상의 자연적 속성이기에 인권의 본질은 강자의 횡포로부터 약자를 보호함으로써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보장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언론에도 고언을 드립니다. ‘무관의 제왕’이라는 전래의 별칭이 상징하듯이 민주사회에서 언론의 권능은 실로 막강합니다. 그러기에 언론이 짊어져야할 책임 또한 무겁습니다. 다수의 독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거대언론의 경우는 더욱더 그러합니다. 인권위원회의 생명이 업무의 독립성에 있듯이, 언론의 생명은 정확한 사실의 보도에 있다는 것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특정 언론사의 정치적 입장이나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에서도 보도는 정확한 사실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은 언론의 기본양식이자 독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입니다. 이른바 ‘북한인권’이나 ‘촛불집회’ 사건의 예에서 보듯이 국가위원회의 법적 권능에 대한 무지, 오해, 사실왜곡과 같은 부끄러운 언론행태는 불식되어야 할 것입니다. 

   

  친애하는 국가인권위원회 동료 여러분, 인간의 존엄을 숭상하는 국민여러분, 이제 저는 물러납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정치적 배경과 철학이 다른 두 분의 대통령의 재직 중에 국제적 관심이 집중된 독립기관의 장의 직을 수행한 행운은 여느 대한민국 국민이 누리지 못한 특권과 축복이었습니다. 다만, 단 한 차례도 이명박대통령께 업무보고를 드리지 못하고 자리를 떠난 무능한 인권위원장으로 역사에 남게 된 것은 제 개인의 불운과 치욕으로 삭이겠습니다. 그러나 다시는 이러한 비상식적인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존경하는 이명박대통령께 간곡하게 호소합니다. 대통령께서는 유엔총회가 결의를 통해 채택한 국가인권위원회의 설립과 운영의 원칙을 존중하고 국제사회의 우려에 경청하시기 바랍니다. 저의 후임자는 정부와 국민의 존중과 사랑을 받아, 지난 8년간 위원회가 범한 약간의 시행착오를 극복하는 한편, 그동안 이룩한 찬란한 업적을 발전적으로 승계하기 바랍니다.  

  흔들리지 않는 신뢰와 사랑으로 저를 지켜주었던 동료들께 감사를 드리고, 위원회의 독립성을 유린하면서 강행한 정부의 폭거로 인해 창졸간에 직장을 잃게 된 동료직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인권의 길에는 종착역이 없다는 사실을. 또한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정권을 짧고 인권은 영원하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우리들 가슴 깊은 곳에 높은 이상의 불씨를 간직하면서 의연하게 걸어갑시다. 외롭지만 떳떳한 인권의 길을. 오늘 우리를 괴롭히는 이 분노와 아픔은 보다 밝은 내일을 위한 작은 시련에 불과하다는 믿음을 다집시다. 제각기 가슴에 품은 작은 칼을 벼리고 벼리면서, 창천을 향해 맘껏 검무를 펼칠 대명천지 그날을 기다립시다.  

   모두에게 건강하고도 화목한 가정의 축복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2009년 7월 8일

    제 4대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안 경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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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하루 종일 TV와 시청앞 광장을 왔다갔다 했다. 출근은 했지만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요즘은 언뜻 사람들이 일상으로 돌아간 듯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내부로 스미는 것같다. 나 역시도... 어제 대학시절 편지를 내어 본 것은 그때 내가 꾸었던 꿈과 이상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내려다 보면 시청앞 광장이 보인다. 그날, 7시 50분 시청앞 광장이 열리자 덕수궁쪽의 사람들이 몰려왔고 오전 10시가 되자 그 광장은 사람들로 가득찼다. 태평로 양쪽으로 폴리스 라인이 설치되고, 사람들은 차도로 올 수 없도록 되어 있었지만 곧 무너지고 말았다. 사람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딴에는 저 사람들을 뚫고 어떻게 영구차가 지나올까 걱정이 되었다.

 

예정된 시간을 넘겨 노제가 시작되었다. 몇몇 사람들이 노래를 불렀지만, 양희은의 노래는 온 세상을 울리는 것같았다. 끝내 이기리라.. 라고 하는 노래가 울려퍼질 때 가슴이 찡하면서 모두가 우는 듯했다. 도종환 시인이 마지막으로 외쳤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광장에 내려갔다가 또 회사로 올라와서 TV를 보다가 또 다시 내려갔다. 때는 두시 반 쯤 되었나. 행렬이 시작되었다. 애당초는 서울광장까지 행진을 한다고 했다. 남대문로쯤 갔을 때는 차량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YTN위에서 노란 종이가 내려왔다. 시민들이 그것을 보고 또 박수를 쳤다.

 

 

 

 

 

 

 

 

 

서울 광장앞에 도착한 행렬은 공사장을 사이에 두고 옆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명박 퇴진 구호를 외치기도 했지만, 군중 속에서 그러한 구호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야 말로 '순수한' 조문 행렬을 원한 사람이었을게다. 곧이어 "노무현 대통령"이라는 연호가 시작되었다. 한참을 가다 보니, 영구차가 바로 내 옆에 있었다. 손을 내밀지 못했지만, 아쉽기만 했다.

 

너무 오래 시간을 비워, 곧 회사로 돌아오니 영구차는 사람들때문에 몇 백미터를 가지 못하고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나서 6시가 다 되어서야 삼각지 부근에서 원효로로 빠졌다가 성남으로 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날 역사의 현장은 그렇게 지나갔다. 아직도 나는 그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나의 나라에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요즘 또 다시 버스 장벽에 둘러쌓인 서울광장을 보며, 한탄을 금치 못한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태어났다. 10.26이후 학교 등교를 하면서, 내가 아주 어렸을 때임에도 불구하고 그날 대통령이 죽었다는 얘기에 울면서 학교를 간 기억이 있다. 그 이후, 최규하 대통령,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이렇다. 내가 대통령 선거권을 갖게 된 것은 물론 김대중 대통령이 대권에 도전하고 실패하여 정계은퇴선언을 했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나는 내 나름의 전략적 투표를 해서, 당선자를 찍은 적은 한번도 없다. 아니, 어쩌면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그를 찍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2002년에는 미국에 있어서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누가 대통령이 되었다 하더라도, 내 인생에서 보면... 전두환은 그래도 자신이 선거를 통해서 정권이양을 하겠다는 약속을 지켰고 양김씨의 분열로 노태우가 당선되었고, 좌절했다. 하지만 그때는 동서 냉전이 무너지고, 우리의 반공이데올로기도 조금 벗어날 수 있었다고 생각이 된다. 91년 남한과 북한이 동시에 두개의 국가로 유엔에 가입하였다. 심각한 자기 중심적 사고를 지닌 김영삼 대통령이 되었을 때는 완전한 문민정부가 이루어지고, 87년의 충격에서 벗어나 민주화의 공고화를 이야기할 때였다. 그 이후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다.. 내 삶의 역사에서 그래도, 후퇴는 없었다. 적어도 우리 정치체계는 모두가 싸웠고 그래서 우리 동시대인들이 쟁취한 민주화의 역사였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은 그 정신에 대한 수구세력의 테러를 상징한다. 참을 수 없다. 사회에 대한 전망을 하는 사람들은 곧, HIT나 오늘 서울대교수 시국선언장에 몰려간 사람들의 예를 들며... 백색테러가 난무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한다. 내 생각에도 그럴 가능성이 상당하다. 우리가.. 지금 멈추어, 절망하여, 좌절하여 싸움을 그만둔다면.. 사회는 9.11 이후 미국 사회가 그랬던 것처럼 정체를 잘 알지 못하는 공포의 시대로 접어들 지 모른다.

 

누군가는 조선시대를 얘기하고, 누구는 6.25를 얘기하고, 또 어떤 이는 노무현 대통령 서거 후 사회가 극심한 분열을 일으켰다고 한다. 언제가 되었건, 중요한 것은 반드시 우리 손으로 이러한 분열 양상을 끝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싸우자. 반드시.. 이겨내자. 지금은 국가권력보다는 때로 언론과, 막강한 시장권력이 세상을 지배하는 듯할 때가 많아 싸움의 전선이 다양화되었다고 할 수 있을테지만, 힘겨운 싸움이라 해도 하지 않을 수 없다. 반드시.. 끝내 이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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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한 일이지만 지난 한주 제대로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멍하게 있다가, 이게 왠 일인가, 안타까웠다가 화가 치밀었다가 괴롭고 미안한 마음이 컸다.

 

27일 아침 잠시 대한문 앞 줄이 짧아졌을 때 문상을 하며 일주일 중 처음 눈물이 났다. 뭘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그저 눈물이 났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 저 분이 왜 죽었다고 하는거야. 나는 노무현대통령의 절대적 지지자가 아니었다. 물론 그의 가치와 이상, 정책 방향같은 것에 이의가 있었던 적은 크게 없었지만, 너무 사회를 시끄럽게 하는 것에 대한 불만, 그 언어... 그게 너무 싫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마도, 나의 친인척들 영향때문인지 이모부 중에는 그와 중학교 동창에 동향인 사람도 있어서 너무나 나와 가깝게(?) 나와 같은 류의 사람으로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오히려 노무현 대통령이 걸어온 길에 대한 관심을 덜 가졌는지도.

 

밤에는 서울광장을 찾았다가 미술관 앞 정동길에 몰려갔다. 한 두어시간 앉아있다가 온 것같다. 옆에는 40대 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들이 앉아계셨다. 누군가는 음모론을 얘기한다. "그 영민한 분이 그럴 리 없어" 사람들은 누구나 믿지 않고 싶은 것이다. 돌아가셨다는 사실도, 그런 죽음의 방법을 택했다는 사실도. 나도 그렇다.. 다른 사람들이 다 가더라도, 나는 무의식중에 그 분을 그리 알고 있었나보다. 절대 포기하지 않고, 투쟁하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끝까지 갈 것이라는 것. 그래서 절대.. 절대 그럴리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부산출신이다. 박연차나 강금원에 대해서는 옛날부터 들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들이 얼마나 힘겹게 기업활동을 해왔는지, 노무현대통령과 어떤 관계인지.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돈이 필요하니, 다른 정치인들과 똑같이 기업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받아냈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 둘은 부산 기업계에서도 주류가 아니다. 한사람은 초등학교만 나왔다는 소문이 돌고, 한 사람은 전라도 출신이다. 그들의 공장이 있는 곳도 잘 안다. 그 곳의 기업들이 대기업은 아니란 것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부산 경제가 어려워지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된 일. 90년대 초반에는 이미 산업기반이 없어지기 시작한 때, 그렇게 어렵게 기업하며 모든 돈을 노무현대통령에게 갖다 주었을 때에는... 그들이 기업하며 뼈아프게 느낀 비주류로서의 설움을 사회의 문제로 돌려 무언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이 밤이 지나면 영결식이 시작된다는 생각에 늦게 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 일이 진짜인가.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제 이 시간이 지나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다만, 잊지는 말자. 너무 쉽게 일상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되지는 말자... 다짐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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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다니는 나는 가만히 생각해본다. 회사에서 보기 쉬운 윗사람은 아랫사람의 일을 하려고, 그것도 열심히 하려고 하는 사람이다. 어지간히 양식을 갖춘 사람인데, 아랫사람의 일을 하려고 한다. 자율성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 곳에서는 아랫사람이 일을 배우기 어렵다. 자기가 자율적으로 기획하고, 일을 추진하는 방법, 자신의 일에 대한 책임을 지는 방법이 없다. 윗사람이 그렇게 자기의 일을 가져가버리니 아랫사람은 정말 그야 말로, 시다바리만 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의 행태를 가만히 보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것. 그것도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생각해본다.

 

노무현대통령이 처음 손댄 것이 검찰개혁이었다. 정치검찰... 검사는 동일체로, 평검사부터 최고 위 검찰총장까지 '동일체'로서 권력에 복속되었다. 법조항만으로 안되면 그 좋은 머리 써가며 무리한 법리를 만들어내었다. 60년대에 만들어지고 한번도 적용된 적 없는 전기통신법 조항을 어떻게 찾아냈는지 참으로 신통한 것이.. 요즘 보는 일이다. 옛날에는 고문에도 가담했다.. "어이.. 이러면 안되지.." 말한마디 하면, 명확하게 고문을 지시한 바는 없지만 그들 세계에서는 통용되는 언어로서, 계장이나 직원들이 무지 막지하게 패고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평검사-법무부 왔다가 아니면 주요 권력기관에 파견갔다가- 서울 지검에 갔다가- 부부장-부장검사-차장검사-검사장.. 이어지는 그 승진은 아예, 애시당초 공안통이 아니면 어려웠다. 그것도 옛날얘기였는데, 이제 다시 소위 '공안통'들이 약진하는 세상이 되었다.

 

강금실 장관은 한 때 언론을 통해 송광수 검찰총장과 팔짱을 끼며 우리 사이좋다고 하는 것을 시위하기도 했지만, 도통 말을 듣지 않는 검찰때문에 너무나 힘들었고, 무서운 조직이라는 말을 했다고 들었다. 심지어 천정배 위원도 실패했다. 그렇다 해도.. 그 법무부와 검찰이라는 조직의 대척점에 서 있는 쪽과 함께 일하는 내 입장에서는, 지금과 그때는 정말 다르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 심지어 검사라는 사람들도, 자신들이 유하고 다른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며, 협력하려는 태도를 갖고 일했다. 그렇게 개인으로 봐서는 참.. 열심히 일하는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검찰이라는 조직이 얼마나 해괴한지, 이 정권이 들어서기 전, 권력이 그쪽에 갈 것이라는 예측을 하면서부터 서서히 변해하기 시작했다.

 

이제야 생각하는 것은 노무현이 정말 바보라서가 아니라, 그 이전 정권에세 너무나 검찰권력의 폐해가 크고 반드시 개혁을 하여 그 독립성을 지켜야만, 그래야만 이전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진정성이 있었다는 점이다. 내가 아는데 왜 노무현이 몰랐겠는가. 권력을 유지하고, 자신이 하는 일을 쉽게 하자면 검찰과 국정원, 국세청 다 붙잡고 쥐어 흔들어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하면 조, 중, 동 쉽게 잡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그렇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못해서가 아니다. 강금실장관이나 천정배장관이 검찰을 완전히 개혁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자신들이 갖고 있던 인사권이라는 것만으로도, 검찰이라는 상명하복식 군대보다 더 군대같은 조직은 설설 기는 척이라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을 보아도, 우리나라처럼 대통령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는 데, 그것도 가장 초기 단계에서 그가 가진 권력을 휘둘렀다면 그가 검찰과 국세청만이라도 붙잡고 일을 해 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

 

그는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정말로 신봉했던 것같다. 주권이 국민에게서 나온다라는 아주아주 그 원칙적인 명제를. 그가 끝없이 권력을 내어주는 바람에.. 그는 모든 국민이 지나가는 개처럼 입에 올리는 존재가 되었지만 그것이 국민이 느끼는 자유와 자존감 그것의 반증이었다. 대통령으로서 할 수 있었던 것을 하지 않음으로 인해, 그렇게 될 수 있었다.

 

검찰에게는 독립성을 선물로 주려고 했다. 어떠한 권력에도 눈치보지 않고 엄정한 법집행을 통하여 국민의 사랑을 받고 신뢰를 받는 기관으로 변할 수 있는 기회를 노무현이 주었다. 아마도 검찰이 가진 유일한 기회였을 것이다. 이제 누구도 그러한 시도를 하지 않을 것이다. 검찰은 그러한 독립성을 줘도 받을 준비도 되어 있지 않고, 이제는 그런 자격도 없다. 그들은 검찰의 독립성을 이루어낼 기회를 차버렸다. 어쩌면, 그렇게도 일순간에 변해버렸을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 조직이라는 것이 그런 것인지. 어쩌면 그렇게 정치권력에 민감하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살다보니, 그렇게 한결같이 검사들이 나와 정치를 하는 것인지. 그것도 꼭 집권여당에 몰려서... 헌법적 가치, 인권보다는 다들 국가(마치 전체주의에서 칭하는 국가처럼)와 법질서, 공공질서 이런 얘기만 해대며... 정치를 하는 것인지. 참으로 혐오스러운 집단이다.

전에는 이 정도로 싫지는 않았다. 그저 집단의 논리가 그렇거니, 그래도 소신있는 훌륭한 사람들이 많다는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었는데, 지금은.... 검사동일체니(이 법조항도 바꾸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렇게 받아들이는 듯)... 위에서 아래까지 다 싫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혐오스럽고, 저질스럽고, 홀로 서라해도 싫다고 떼쓰는 성장하지 못하며 유치한 집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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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2년 대통령선거가 한창일 때 나는 유학중이었다. 외부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국민들의 감정적 투표 행태, 어느날 갑자기 유치한 정몽준이 지지를 철회한다는 얘기를 하자, 밤새 투표를 독려하고 갑자기 유의미한 정도의 표가 노무현에게 갔다는 것은 차치하고서도, 정치계에서 그렇게 검증되지도 않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위험한 선택같이 보였기 때문이다.

 

2. 대중적 인기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여론이라는 것은 조작하기도 쉽다. 단어 하나에 미치는 어감 같은 것, 이런 것은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몇 번 다루어진 얘기일 뿐더러, 정치커뮤니케이션 같은 데서는 아주 고전적인 얘기들이다. 말하자면 대통령 후보가 TV토론에 나갈 때는 붉은 색 타이를 하는 것이 좋다든지, 투표 번호는 1번이 좋다든지 하는 류의 분석들이 있어 그것을 금과옥조처럼 따르고, 간혹 여론의 향방이 불리할 때는 사건을 만들어 물타기를 해버리는 것도 내가 예전 공부했던 분야에서는 아주 고전적이라 누구든지 알 수 있고 생각할 수 있고 너도 나도 다 쓰는 방법이었다. 여하간 여론이라고 하는 것은, 현대 민주사회의 전제인 이성적 인간들의 합의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정체에서 합리적 인간들이 판단하는 의견의 집합 정도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외려 심각하게 조작될 수 있고 한 두개 수틀린 무언가 아주 별 것도 아닌 것들 때문에 부정적으로 변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그렇게 노무현에게 쏠려가던 사람들의 희망과 때로 무비판적으로 보이던 지지가 이해되지 않았다. 마치 미국에서 고어가 모든 것을 갖추었으나 너무나 엘리트적인 이미지 때문에, 차가워 보여, 자기들과 동떨어진 듯해서 대선에서 패배했다는 분석이 많았던 것처럼, 이회창이 딱 그런 이미지여서, 이 나라에서는 고대생도 국회의원을 하느냐는 투의 얘기를 했다고 해서, 우리나라 대법관 중 법리로서는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 이회창이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그 한편, 좀 정이 가지 않아도 합리적이고, 헌법적 가치에 대한 이해도 있는 사람인 이회창이 되면 지난 노무현 정부 시절의 그 시끄러운 일들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던 것이다.

 

3. 얼마간 나라가 돌아가는 양태가 하도 희한해서, 나는 나라를 떠나고 싶을만큼 절망했다. 그래도 한편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거나 급진적인 사람들은 여전히 다수이고, 우리 국민들은 가치에 대해서나 전통적인 정치, 무언가 공적인 소구에 감흥하지는 않아도, 자신의 이익과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키기 위한 행동을 하기는 한다는 생각을 작년 FTA협상, 광우병, 촛불시위 정국에서 보았기 때문에 희망을 생각했다. 간혹 농담처럼 이 나라에서 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건지 난 모르겠어 라고 했지만, 어쩌면 국민들은 그것보다는 더 부드럽게 생활속의 민주화를 이루어갈 저력은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4. 각설하고 노무현 정부의 최고 실패는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도덕적 가치, 이상을 얘기하고 그것에 자기의 정치적 기반을 두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386의 이상이 현실에 발을 딛지 못하고 일을 풀어나가는 방식에서, 이상을 현실에 구현하는 방식에서 아마츄어리즘을 드러내고,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킨 면도 분명히 있다고 본다. 대통령이란 헌법적으로 보아도 행정부의 수장이고 국가원수이니, 행정 전문가의 얘기도 듣고 사회합의를 이끌어내는 방법에서 우리가 옳다고 얘기할 것이 아니라, 때로 아주 가치중립적으로 보이는 '효율성'같은 것을 얘기했다면 어떠했을까. 또 정치적으로 더 유연했다면 어땠을까. 마키아벨리가 주창하는 바처럼 목적을 위하여 간악한듯 보이는 계교도 한번 부려보았다면 어땠을까. 정권의 기반을 도덕성에 두고 있었으니, 어떻게 법리로 싸우면 범죄가 되지도 않았을지 모를 그 사람이.. 도덕적으로는 문제가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견딜 수 있었겠는가. 그것은 자기가 놓은 전제를 부정하게 되는 일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5. 46년 생.. 60이 겨우 넘은 나이. 아무 것도 없는 삶에서 대통령이 되기까지 그가 싸워온 것은 반대로 지금 그를 너무 힘들게 하는 것들이 되었을 것이다. 싸울 힘을 주기도 했고, 이제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했고.. 그 개인의 힘겨운 삶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오늘은 하루 종일 여러가지 생각이 많았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견고했다. 그 적군이. 지금 내가 우리 나라 상황에서 느끼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그들이 원하는 일이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외려 당연하게 생각하는 일이라는 것.

 

6. 오전 9시 40분.. 돌아가셨다는 첫 소식을 동생의 전화를 통해 알았다. 그 후 하루 종일 마음이 무겁고, 어떻게 표현하지를 못하겠다. 한편 내가 검찰과 우리 사회 지배계층의 가치와 연줄망에 대해, 또 우리 국민들이 노무현 대통령을 어떻게 대했던가, 내가 그를 어떻게 비판하고 평가했던가.. 여러가지를 생각하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슬픔과 애통함을, 괴로움을... 검찰에 소환된 3번째 대통령이라고 하며 전두환, 노무현과 같은 선에 두는 그 객관적인 듯 보이는 언설을, 죽어라.. 라는 얘기를 들먹이는 지식인, 끝없이 그를 조롱했던 언론, 색으로 편가르고 싸움으로 대응하는 우리 정치 문화.... 모든 것을 하나의 글에 담아내기는 어렵다. 가능하다면 계속 쓸 것이다. 내 속이 좀 풀릴 때까지. 이 분노와 슬픔과 좌절을 좀 풀어낼 수 있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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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은 나보다 먼저 '아줌마'의 길로 갔다. 내가 얼마나 '잔악'한 언니였는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바, 우리 동생은 입버릇처럼 자기 신세와 나의 '팔자'를 
비교하며 그렇게 얘기한다. "언니는 팔자가 좋아서 아이도 누가 다른 사람이 
키워줄 것같다."  여하간 1999년인지.. 내가 정식으로 우리 동생에게 그동안의 
악행을 사과하기까지 나는 동생에게 거의 '악마'나 다름없었다. 

어릴때 나는 바로 아래의 동생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아마 걔는 이러저러한 
사람들에게 나의 동생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을테다. 어릴적 나는 우리 동생이 
나보다 그림을 잘그린다는 사실, 그리고 문학적인 상상력이 발휘되는 곳에서는 
나보다 글솜씨가 낫다는 사실을 참 인정하기 싫었던 것같다. 

여하간에 1년간의 연애를 통해 결혼을 하게 된 동생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서 마음이 내내 무겁고 미안했다. 그리고 이번에 서울에 가서 동생과 
일주일동안 같이 있었는데 우리 조카는 17개월된 남자아이로, 온 일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동생은 시어머님을 모시고 산다. 시어머니는 아들만 
4형제가 있는데 김치담그기가 취미인 분이다. 나는 평생 들어보지도 못한 
'꼬돌배기'김치라는 것도 우리 동생이 시집을 간 후에 한번 먹어볼 수 있었다. 

동생이 안스럽기는 했지만 나는 미국에 있는 동안 동생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사람이 못가진 걸 부러워하는 법이긴 하지만, 착한 남편-막내라 좀 
답답한 구석이 없잖아 있다고 하더라도-과 이쁘고 똘똘한 아들과, 언제나 엄마 
엄마 자기만 믿어주고 신뢰해주는 그 아들이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달리 
부족한 것도 없이 사는 거 아닌가.. 나처럼 집도 없고, 애인도 없고, 돈도 
없고, 학위도 없고, 가진 것 아무것도 없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그런 신세에 
비하면 얼마나 그럴싸한가.. 내가 정말 하고 싶은게 결혼하고, 아기갖고 
그런거였으니까.. 

동생은 동생친구의 어머니께서 인근 병원에 입원했다고 전복죽을 쑤어갔다. 
첫째날, 내가 점심을 사준다고 불러냈는데, 비가오는 바람에 멀리 가지도 
못하고 어쩌다 간 곳이 정말 맛없는 스파게티집이었다. 그래도 동생은 
좋아했다. 

일주일동안 삼일을 백화점에 갔다. 나는 아이를 데리고 동물원, 고궁, 공원 
이런데 가자고 했는데 동생이 도무지 피곤해서 움직이지를 못했다. "언니는 
아줌마들의 즐거움을 모른다." 백화점 가봐야, 아들 옷, 남편 옷이나 
들척이다가 사지도 못하고 오는데, 나는 살 거 없고 돈 없으면 백화점같은데 
안가는 성격이니까.. 그런데 가지 말자고 하는데도 동생이 하는 소리였다. 결국 
백화점에서 우리 조카 하나에 여자 넷이 매달려 잡아도 감당이 안되고 그날 
나는 뻗었다. 바닥에서 기고, 뒤로 넘어가고, 짜증내고, 혼자 걷겠다고 악쓰고, 
에스컬레이터 혼자 타러 뛰어가는거 잡으러 다니고.. 
그리고 와서는 어지르는 조카 쫓아다니며 집 치우고, 시어머니, 남편 따 때때로 
밥차려주고-늦게 집에 오면 먹고나 들어오지 왜 꼭 집에 와서 밥을 먹는지 
이해가 안된다. 암튼 시어머니와 함께 담은 간장, 된장, 김치, 다 싸서 세집에 
보내고, 그러고도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못듣고.. 

남편은 피곤하다고 새벽에 그렇게 안자고 깨는 조카만 피해서 침대로 저 방으로 
, 바닥으로 마루로 도망다니기 바쁘고.. 6일 휴일, 집에 들어와 계속 축구만 
보고 9시부터 잠자고, 동생과 나는 2시까지 조카 비위맞추고, 시어머니 
비위맞추고.. 동생은 예민한 조카때문에 옆으로만 누워서 팔베개를 
해준다고,허리 디스크에 잠못자고 만성피로에 간까지 상하고, 신장도 안 
좋아졌는데, 남편과 시어머니는 결혼전부터 아팠다고 철떡같이 믿고 있다. 

"언니야. 나는 나 잠 방해하는 사람은 다 속으로 욕한다. 니는 개새끼다. 근데 
아줌마들이 욕느는게 나 이제 이해가 된다. 내 친구들도 다 욕한다.. 이제 .. 
욕하나도 할 줄 모르던 아이들이 결혼하고 아이기르면서 욕이 늘더라. 근데 
욕하면 참 시원하다."하면서 웃더라. 서글퍼졌다. 돈 아낀다고 결혼하고 카페도 
안갔단다. 밤에 산책나와 커피나 마시자 내가 이끌어도, '롯데리아가자."하는 
동생을 보며 나 기겁했다. 교보문고에서 음반 할인한다고 왕창 사는 나에 비해 
이것저것 역시 보다가 안 사고 마는 동생보며 내가 잘못했다 싶었다. 된장찌개 
고추 안넣길래, 맛없다.. 그랬더니 조카가 싫어하니까 안된다고 했다. 

그래도 언니 있는 동안 잘 챙겨먹고 살았다고 하는 동생 보고 안스러웠다. 
"제발 다리좀 붙이고 걸어라." "언니가 모르는데.. 이게 아이를 낳으면 골반이 
벌어져서 붙이고 걸으면 걸음걸이가 이상해진다. 우리 남편이 많이 깔고 
앉아있었어야 했는데 하나도 안도와주더니만.. " 어쩐지 서글프다. 
사회생활하고, 돈버는게 쉬운 일 아닌 것도 알지만, 어째서 집에서 살림살고 
아이 기르는 사람들의 삶은 그렇게 힘들다는 인정조차 못받으면서 이렇게 
서글픈가.. 아이, 남편, 다.. 사랑해도 그들을 사랑하는만큼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는 왜 없는 건지.. 아직도.. 어쩜 세째에게 빨리 결혼하라고 
재촉하는 것도 잘못일까 싶기도 하고,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아줌마들 화이팅! (이 얘기 꼭 하고 싶다. 한국전쟁 터지고, 난민촌에서 
강하게 가족들 지켜낸 우리나라 아줌마들 없었으면 대한민국없었다. 6,70년대 
개발시대도 마찬가지다. 민주화도 남자들이 웃대가리에서 의장님 대접받을 때 
더러운 일 많이 당하고 풀뿌리 남은 사람들 여자들도 남자못지 않게 많다. 꼭 
이분법으로 말하고 싶지 않지만, 월드컵 축구이겨서 대한민국 국민인 거 
자랑스럽기 보다, 좀 다른 거 찾아보고 자랑스러워야 하지 않을까.. 나는 요즘 
9.11 테러 이후 미국에서 내가 느낀 감정과 지금 우리 나라 월드컵 열기를 보며 
외국인들이 느낄 감정을 생각해본다. 다른 얘기도 좀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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