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봄에 대한 기억은 몇 가지 없다. 짧은 봄.. 잠들지 못하는 밤들의 시작..
병실과 어딘가 달라진 나의 몸.. 챠우챠우.. 내마음을 뺏어봐 그리고 거짓말.
그 봄.. 가끔 느껴진 통증으로 인해 우연히 발견한 나의 병은.. 죽음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끔 만들었다. 사춘기 소녀에게 진지한 철학적인 주제로,
조금은 낭만적으로 다가왔던 그 '죽음'의 문제가 그저 '삶' 속의 삶의 문제가
되었다.
내 보호자는 나일 뿐이라는 생각을 더 철저하게 했고, 보호자 없어요?라는
하루에 수십명의 환자를 보는 병원장의 수족 같은 의사는 너무나
비인간적이었다. 너 아니라도 수술할 환자 많다. 별 것도 아닌데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아라. 하기야.. 여기서 종합병원에 가면 나와 한 시간 이상을
얘기하고, 오후에 약 4-5명의 환자를 보면 많이 보는 그런 진료환경과
비교한다면 이해할만하다. 어떤 환자에게도 측은함이 없는 의사들. 검사결과를
듣고 나와 바로 아버지와 교수님께 전화를 드려서 "별 거 아니래요. 수술
받으면 아무 이상없대요."
낄낄거리며 얘기하다가 혼자 집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생겼어..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내 곁을 지켜줬지만, 또한 나를 외롭게 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별 것 아니라고 정말 위로한 게 아니라, 그 문제가 내게
얼마나 중요했던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친구들.. 아무도, 단 한명도 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어쩜 그건 당연하다.
절친하다는 친구가, 남자친구가 나와 똑 같은 병에 걸렸을 때 울고 불고,
자기도 마치 죽을 것같이 굴었을 때는.. 그냥 아무 측은한 심정이 들지 않았다.
단지 사랑과 우정이란 게 그렇게 다르구나 생각했을 뿐이다. 너한테 병문안조차
가지 않았던 게 미안하다 했을 때에도, 그것은 이미 사과를 하고 하지 않고의
차원을 넘어서 내게 깊이 홀로였던 기억의 상처였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 기억해냈다. 나 수술실 들어갈 때 웃으며 들어갔지만,
정녕 울면서 가슴아팠던 사람은 엄마 딱 한 분이었던 사실을. 4월에 진단을
받고 5월에 수술을 했다… 봄이었다..
거짓말은 그 무렵에 종반부에 치닫고 있었다. 유호정이 그때쯤은 자궁을 떼는
수술을 받고 호숫가 집에 가서.. 이성재에게 그렇게 말한다. "넌 다 기억한다.
내가 잊은 것까지도.. 그러면서 너 날 어떻게 잊을래?" 이성재는.. 유호정이
자기를 보내기 위해서 그 수술을 받은 걸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같다.
여자가 여자라 생각할 때, 한 남자를 사랑할 때 그의 아이를 갖고 싶었던, 아주
조그만 그를 닮은 아이를 낳고 싶었던 그 소망을 포기하는 심정을 아마 알 수는
없을 것이다. 98년 봄.. 내 나이와 유호정의 나이는 같았다.
조금전 거짓말을 비디오로 다시 다 봤다. 다행인지 뭔지.. 외국에 교포들을
위한 비디오샵에서 예전 드라마 카피 하나씩 남겨두는데 이 동네 몇 군데
비디오샵 중 딱 한군데에 그 테잎이 남아있었다. 37의 언니와 함께 보면서 많이
울었다. 그들이 이혼법정을 나올 때, 그녀가 수술을 받을 때, "네게 나는
남자였구나" 김상중이 얘기할 때, 배종옥이 사랑이 다시 올까 엉엉 울 때..
문밖에 걸려 있는 선인장 목걸이를 볼 때..
예전에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감정이입이 전혀 되지 않던 배종옥에게
지금은 어느 정도 마음이 가는 건.. 나이탓일까..
그들의 사랑에서 나의 사랑을 본다. 그리고 98년과는 조금 달라진 나의 해석도
재미있다. 그래도 여전히.. 유호정이 하는 말이 가슴에 더 와닿는다. 나의
경험과 맞닿아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때 나는 27이었다.
모두가 상처받은 사람들이었다.. 내게 확실한 단 한가지 있다면.. 상처받지
않은 사람은 세상에 없고, 상처를 드러내지 않는 자는 믿지 않는다.. 사람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거 하나다. 여자들의 특이한 점.. 상처받은 영혼을
사랑할 때.. 그를 가슴에 안는다.. 여자의 강인한 사랑일 것이다. 치유하는 힘.
남자의 특이한 점.. 여자가 보기에 어리다. 우유부단하다. 특히 사랑에
있어서는.. 사랑하는지 안하는지 모른다. 드라마에서 주현이 가르쳐주는
판단법이 있다. 그 여자랑 있을 때 집에 가고 싶으니 손잡고 싶으니.. 세상에
많은 불쌍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불쌍해 보이는 건 그 사람한테 마음이
간다는 얘기다..
사랑하는 사이이면서 친구가 될 수 있지만, 사랑하면서 친구만이 될 수는 없다.
친구와 애인과 부인은 다 별개의 존재들이다. 아무리 그 영혼이 마음에
와닿는다 해도.. 사랑은 거기 나오는 것처럼 '둘이서 하는 것이지 셋이서
하는게 아니고' 몸만 가는 것도, 마음만 가는 것도 아니라 다 순리대로
가는거고.. 모든 사람 다 아픈데도 그 사람의 아픔이 보이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할 때. 사람들은 머리를 너무 많이 굴린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지
안하는지를 판단하는데도, 같이 살지 말지를 생각하는데도.. 어떻게 표현할지에
대해서도.. 하지만 자기 마음가는 것 잘 보고 잘 따라가면 된다. 단순한 표지를
따라서.. 그 사람 생각 많이 하면, 내 마음이 가는 거고, 그 사람이 아픈게
가슴아프면 내 마음이 더 간거고, 같이 살고 싶으면 더.. 가 있는 거고..
그러면 그냥 사랑한다고 말하고, 같이 살자.. 그렇게 말하면 좋은 거 아닐까..
하기야.. 37살 말띠 언니가 물었다. "넌 뭐가 문제라서 이러고 있냐?"
"콤플렉스 때문에.." "뭐라?" "나는 내 사랑하는 남자에게 아무것도 줄게 없고,
그리고.. 여자로서는 전혀 매력이 없다고 믿고 있거든." 사랑하면서 나를
뒤돌아보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지.. 그러니까 단순해지는게 진짜 용기인지
모른다.
오늘은.. 봄바람이 살갗을 간지르듯이, 눈을 감고 있으면 마치 깃털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가듯 내 피부의 모든 감각이 살아나게끔 느껴지는 그런 바람이
불었고, 거짓말을 보고 사랑과 외로움과 허물에 대해 많이 생각했고, 지나온
4년이 길었던 시간이라는 걸 알았고, 98년 봄 생각에 마음이 많이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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