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과 같은 기말고사 기간이 끝나자 글을 읽고 쓰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다.
우스운 일이다. 기말고사 기간 동안, 미리 research도 해 놓지 않은 탓에
엄청난 두께의 영어 논문과 책들, 60장도 넘는 답안들을 써냈건만 그래도 그
욕구는 역시 나의 얘기를, 내 머리뿐만이 아니라 일부러 억제해놓은 감성을
동시에 자극할 수 있는 책을 보고 싶다는 걸 테다. 우스운 일은, 이제 머리만
굴려야 하는 책은 한글로 봤을 때는 더 이상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고 이해도
못하는거다. 무슨 소리인지. 한편 번역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
역시 우리의 역사적 경험과 토대가 없이 서구 학문을 통째로 들여와 분석하고
마는 학문적 토양자체의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글쓰는 것을 업으로 삼은 사람에게 참 희한한 것을 발견했다. 아직 나는 그런
걸 느끼지 못하고, 별로 관심도 두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글만
대하던 사람들은 그 글을 보고, 문체를 보고 사람을 읽어낸다는 것을 알았다.
내 글을 보여줬을 때 그 사람의 말.. 어떤 주제로 글을 쓰든지 외로움이
묻어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글을 보여줬더니 "참 다정다감하고 고상한
사람이다"라고 하길래 "당신 점장이야?" 했다. 내 글은 야밤에 혼자 통신하며
읽기 좋은 글이란다. 만연체도 아니고, 일정 정도를 넘어서는 깊이가 없는 것.
마치 영상이 내용을 제한하듯이, 컴퓨터 통신이라는 기술이 글의 문체와 내용을
제한하는 것. 그리고 이제는 컴퓨터가 아니면 글을 쓰지도 못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것을 바라기도 쉽지 않다. 그녀가 말했듯이 내 글은 문어체다. 말을 할
때 이렇게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사변적이면서도, 생각나는대로 쓰는 글이다.
감정에 있어서도 내 맘대로 내 마음선을 따라서 그대로 '질러버리는 글'이다.
가끔씩 한번 꼬아보는 것은 단순하게 얘기하자면 '내 사람'과 '아닌 사람'을
걸러내는 작업이다. 그녀가 다른 사람의 글에 대해서 한 말.. "이 사람은
구어체구나. 누군가가 꼭 옆에서 듣고 있는 것처럼 감정을 정리해놓고 말을
차근차근 딱딱 맞아떨어지게 쓰는구나. 니가 질그릇이면 이 사람은 크리스탈
같은 사람이다. 니가 심수봉 트롯트 느낌이면 이 사람은 클래식이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질투를 느꼈다. 후..
요즘 내가 자주 쓰는 말은 "맺고 끊기 분명히 하자. 모면 모고 도면 도고,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고 사랑하면 사랑하고 싫으면 깨끗하게 헤어지라."
하기야, 여기 가끔 키즈 사람들이 얘기하는대로 '바닷가 시골 출신, 전직 여자
깡패'의 본성을 내가 어찌 털어낼 수 있으리. 결국 나는 죽어도 고상한 사람은
못될 거라했다. 사람이 출신성분을 어찌 버리나.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난다.
어릴때 국사시간에 삼국사회에 대해 배우면 고구려 사람들 말달리고 유목민처럼
사는게 제일 좋아보였다. 아무리 족보 어쩌니 해도 내 본성은 어쩌면 그
대륙에서 황량한 바람일으키며 말달리던 여진족 여자 같은 것이었을지 어찌
아나. 피가 섞였을지도 모를 일. 그러고 보면, 언제나 '정착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바람처럼 떠도는 삶을 살고 있는게 그게 정말 내 꿈이었는지..
그렇다면 나는 꿈을 이루어가며 사는 건지도 모를 일이지. 이제 다른 꿈도
한번 꾸어볼 때가 되지 않았나. 나이 서른을 넘어섰다…
요즘 여성계에서는 '나혜석'에 대한 재평가가 한창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재수할 때 국어 선생님이 가끔 그런 말을 했었다. 나혜석이 쓴 글을 읽어주면서
이 여자가 하는 말이나 지금 여성운동가들이 하는 말이나 별반 차이없다… 다른
모든 걸 차치하고,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행동과 선택을 하는 여자들에 대한
가차없는 사회의 낙인찍기는 여전한 것같다. 특히 한국같이 사람들 득실거리는
곳에서는 더더구나, 뻔히 노출되어 있는 나의 사생활에 대한 관심. . 쓸데없는
말들.. 그렇게 반항하면서 살아간 여자들이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얼마나
힘들게 살았을지 모를 바 아니니, 한번 그렇게 살아보고 싶기도 하다. 남들
안가는 길, 안하는 것 하면서.. 죽어도 한번 '악'소리 지르고 화끈하게 죽고
싶다. 뭐.. 이런건가. 여하간 나는 천출일지언정, 결코 고상한 공주과에
들수는 없는 태생적인 한계를 지니고 태어났을지라도 수치를 모르는 인간은
아니니 부끄럽게 살지는 않을거다. 다만, 얘기하고 싶다. 내가 어떻게 살든지
손가락질 하지 말아라.. 너보다 떳떳하게 살았다. 여지껏도 그리고 앞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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