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으로서, 선교를 지상과제로 삼고 있는 대형교회에 몸담은 지 어언 십수년이 지났다. 그 과정에서 지금은 어느 정도 비판적으로 보고 있는... 내적 치유, 단기 선교, 남성위주의 섬김 문화, 선교에 헌신하기 각양 각색의 일들이 내게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남들에게 믿음없는 자의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내 믿음에 대해 타인과 소통하지 못했던 불찰이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절대자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고, 그저 알고 싶었다. 침묵하면 소리쳤고, 힘들면 왜 나를 이리 괴롭히냐고 해댔을 뿐이다. 그 과정이.. 개인의 믿음 성장에서 필수적인 과정이었다고 생각하고, 앞으로도 아마 그런 일들이 가끔은 있을 것이다.
사랑이가 나은 과정, 내가 유학했을 때의 아픔, 어릴 때부터 갖고 있던 허약함, 엄마의 죽음의 과정.. 모든 것을 보면서 대체.. 무엇인가 무엇인가. 조금 다른 방향으로도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현경의 책도 가끔 나의 그런 질문을 싹틔우거나 자극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내가 믿은 것이 맞느냐고.. 진실에 다가가고 싶었다. 그를 알고 싶었다. 하나님. 하나님.
밀양이라는 영화를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스토리를 들은 즉슨, 요즘 선교갔다가 피납되었다, 또 돌아온 자들에게서 내가 느끼는 감상과 어느 부분인지 구체적으로 무엇이다.. 얘기하기는 어려울 지 모르지만 맞닿아있다. 불편한 느낌. 그러니까.. 자기가 유괴해서 살해한 아이의 어머니에게 용서를 빌지 않으면서 하나님에게 용서받았으니 나의 죄는 깨끗해졌다.. 라고 하는 사람, 그 사람을 보며 절망하고 신에게서 돌아서는 한 여자.
똑같이 선교의 길을 떠나서, 죽은 자와 산 자. 돌아온 자는 하나님의 계획, 해결사의 하나님을 말하는지,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셨다 간증하고 믿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 곳에서 죽음을 겪은 자와 남은 가족에게 천국을 말한다지만.. 전혀 들리지 않는 얘기. 그 하나님.. 살려주는 것이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죽은 사람에게 그 하나님은 죽음이었을까.
C.S.루이스의 헤아려본 슬픔에서였는가 상실의 슬픔을 겪는 사람에게 천국의소망을 말하는 것은 정말 무책임한 얘기였다는 것을 고백했었다. 자신이 그 슬픔을 당하니.. 그저 슬픈 것은 슬픈 것이었다고.. 그렇다. 위로는 슬픔을 같이 슬퍼하는 것에 있는데, 목사님.. 슬픈 사람에게 그 슬픔을 그저 같이 느껴주는 목양을 보여주시지 왜 천국의 소망, 그 복만 얘기하셨을까.
왜 돌아온 자들의 가족은, 죽은 자의 가족을 배려하지 못했을까. 어찌하여 죽은 자의 가족은 산 자의 가족을 배려하여 자기를 숨겨야 했을까. 왜 산 자의 가족은 그 귀환에 그리 기대하고 흥분되는 하나님의 역사였다는 지극히 자기개인적인 신앙을 그렇게 하니님의 뜻이라고 얘기했을까.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드러나거나, 나의 뜻을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지 모르지만, 이 때 혹은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의미가 드러나는 그 역사적 시간들, 순간 순간에서 겸손함을 구하는 것.. 무엇보다 내 눈앞에 보이는 사람, 공동체.. 그 속에서 선함을 구현하는 일이 먼저이지 않은지.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이지 않은지. 교회가 사회과 별개가 아닐 것이며, 공동체에 대하여, 자기와 믿음을 달리하는 자들을 포용하고 그들과 소통하고, 위로하고 사랑하는 것.. 그런 것이 먼저가 아닌가.
뭐 이러저러한 생각이 왔다갔다 한다. 나의 하나님... 하나님. 무엇인지 내게도 알려주는 것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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